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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이우’ 역사적 이해 돕기 위해 북트레일러 선보여!

가디언이십일 2014. 2. 16. 00:45

김종광 소설가의 첫 역사소설 ‘왕자 이우’, 다산북스가 제작   

 

 

 

 

 

 

1945년 8월 6일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 그곳엔 일본 군복을 입은 한 조선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몸이 아픈 부하에게 선뜻 자동차를 내주고 말을 타고 출근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윽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뜬 남자는 온힘을 다해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 기어코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방된 조국의 군복을 간절히 입고 싶어했던 그의 이름은 이우(李鍝), 의친왕 이강의 아들, 운현궁의 네 번째 주인이며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다. 황적에 오른 조선 왕족 중 유일하게 조선인과 혼인한 남자, 잘 생긴 외모와 다정한 성격으로 황실 핏줄들에게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렸던 남자.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로맨티스트였고 조선의 독립을 꿈꾸었던 혁명가였다.


그의 장례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한 이후로 미뤄 치러졌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왕자 이우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야스쿠니신사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군인들의 영령이 합사된 곳으로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조선인 출신 합사자는 무려 2만여 명에 달한다. 이우는 해방이 한참 지난 후인 1559년 4만5천여 명의 군인들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일본은 유족의 허락도 없이 수많은 조선인과 이우의 영령을 일본인 전범들과 함께 붙잡아두었다.


이우는 자의든 타의든 일제에 협력한 황족과 달리, 일제에 저항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동급생 아사카 타카하고는 “이우군은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습니다. 글자쓰기도 능숙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습니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저는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그에 대해 증언했다.


일본은 여전히 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총리 및 저명한 언론인마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지금, 우리 역사의 위대한 왕족 영령은 여전히 야스쿠니에 붙잡혀 있다. 슬픔과 분노가 함께 느껴지는 현실 앞에 정부 차원의 강력한 대응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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