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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이 경운궁 될 수 있나?

가디언이십일 2011. 12. 3. 17:00

덕수궁이 경운궁 될 수 있나?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사적 제 124호 덕수궁의 명칭 검토를 위한 공청회를 2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하는것으로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공청회는 지난 7월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 변경 시에 확정하지 못한 덕수궁의 명칭에 대하여 학술적인 측면에서 논의하기 위한 자리로 알려졌는데 원광대학교 이민원 교수가 ‘덕수궁 유지’, 명지대학교 홍순민 교수가 ‘경운궁으로 환원’에 대한 발제 후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동 문화재위원, 김도형(연세대 교수), 김태식(연합뉴스 기자),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김인걸(서울대 교수),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희용(전 경기예총 부위원장) 등이 발제 내용에 대해 종합 토론을 벌이며 공방이 예상된다.


덕수궁(德壽宮)이라는 궁궐의 명칭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하였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궁궐들이 소실되어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어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을 1593년에 임시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1608년 이 곳에서 즉위하고 3년 후인 1611년에 임시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하였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가게 되고 대한제국 선포 후 법궁(法宮)으로 삼았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이후 1907년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직후 순종은 경운궁을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것으로 전해졌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덕수궁」명칭에 대한 공청회 결과 등을 토대로 문화재위원회에서 덕수궁의 명칭변경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한편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소장은 경운궁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의견을 강하게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경운궁은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임시로 이곳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해군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으로 쫓아내 유폐시킨 뒤 이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아예 없애버렸다.


세월은 흘러,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에 머물던 고종황제가 이곳 경운궁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된다. 1904년 일어난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불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등을 지으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본래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의 입구 대한문

              덕흥전과 합녕전 뒤로 금강송과 정광헌이 보인다.
 


大漢門에 대해서도 큰 도적이 다니는 문의 의미라고 억측이 많았는데 1907년 1월에 편찬된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이근명이 지은 상량문에는 “한양은 띠를 두른 형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 韓邦의 門戶의 땅이다. 冽水가 남쪽을 지나가고, 太岳이 북쪽에 우뚝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하가 표리를 이루고, 天府가 열려 들이 되었으며, 衆心이 굳게 뭉쳐서 성을 이루었다.


황제 폐하께서 명당에 앉아서 萬乘의 자리에 오르시고, 환구에 제사하고 三聖과 耆社를 좇아 至治를 이루고 있다. 檀箕 이래 수천 년의 제업에 조창하여 송나라와 명나라에 직접 닿았다. 황제는 천명을 받아 維新을 도모하여 法典인 中和殿에 나아가시고, 다시 大漢正門을 세우셨다. 大漢은 __漢과 운한의 뜻을 취한 것이니, 덕이 호칭에 합하고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온다. 대한문의 동쪽은 아침햇살이 처마 위를 청흥으로 물들인다. 대한문의 북쪽은 솟아오른 三峰山이 秀色을 보내고, 대한문 아래는 마을이 天門을 열고 四野로 뻗었다.”고 씌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한’이니 ‘운한’이니 하는 것이 모두 ‘하늘’의 의미라 하였으니, 대한은 결국 ‘큰 하늘’이라는 뜻을 담아,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품고 있다. 대한문에 담긴 이러한 의미는 다른 궁궐의 정문이 담고 있는 뜻과는 지향점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이 지향하는 바를 호기 있게 담고 있는 것이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이곳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기존 조선의 전통적인 질서와 법식에 의거하여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된 조선과 대한의 연결선상에 있는 주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부에서 100년 이상 부른 이름이라 하는데 덕수궁은 600년을 이어온 우리의 역사이다.


일부에서 덕수궁을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구실을 댄다. 매사를 일제 핑계로 돌리는 것은 옳은 역사의식이 아니다.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시기를 이어온 엄연한 우리의 역사다. 일제의 압력이라는 증거는 아직 조사된바 없는 막연한 억측일 뿐이다.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의 역사·문화적 명칭인 것이다.


또 한편에선 덕수궁의 의미와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경운궁으로 환원하자면 그에 타당한 건축물의 중건도 따라야하며 이미 조선의 역사는 마감했다. 덕수궁으로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역사를 기억해야한다.

 

                덕수궁 중화전 
 


오히려 덕수궁은 종묘와 사직단처럼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국가주요건축물이다. 따라서 궁궐건축물의 다양성 있는 형태 보존을 역사·문화적 강점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정창곤 기자 oldpd@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