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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미국에 이용되는 빈 라덴의 생애.

가디언이십일 2011. 5. 4. 01:49

죽어서도 미국에 이용되는 빈 라덴의 생애.
미 중앙정보국이 키우고 죽인 남자, 그는 몰랐다.   
   
  
  
199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지내면서 계속 대미 테러 활동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진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2일 파키스탄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집중 취재했다.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에서 사살당한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1957년생인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남서부에 있는 항구도시 지단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80년대 중반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아랍 의용군을 조직하여 소련(러시아)군에 맞선 전사적 인물로 전해진다.


그배경의 아이러니한 부분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 공격의 핵심 용의자이며, 아프리카 지역 미국 대사관 폭탄 공격 때문에 연방수사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준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과 아프간 전쟁기간 중에 "역설적으로도 미국 중앙정보국의 후원 아래 소련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도록" 불려 나왔다는 것이다.


1979년 당시 소련이 친공산 정부인 바브라크 카말(Babrak Kamal)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중앙정보국 사상 최대 규모의 비밀 공작"을 벌였다.


아프간의 성전(지하드)을 부추겨 소련에 대항하는 전체 무슬림 국가가 참여하는 대전으로 만들고 싶어한 중앙정보국과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ISI, 인터 서비시스 인텔리전스)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가운데 40개 나라에서 3만5천명의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여했다.


이슬람의 "성전"은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후원했는데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같은 일련의 성전 과정에서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를 이용해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는데 그 결과 중앙정보국이 후원하는 게릴라 훈련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합쳐져 더욱 발전하기에 이른다.


요컨데 주제는 이슬람교가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이며 성스런 이슬람이 무신론자인 소련 군대에 의해 침해당했으니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좌파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독립을 다시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빈 라덴군의 전략적, 군사적 작전능력의 배경과 관련해 카이로의 알아람 전략연구센터(the Al-aram Center for Strategic Studies)의 아브델 모남 사이달리(Abdel Monam Saidali)에 따르면, 빈 라덴과 아프간 아랍인들은 '중앙정보국이 허용한 고도의 세련된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중앙정보국의 밀턴 비어드먼(Milton Beardman)은 오사마 빈 라덴이 워싱턴을 위해서 하고 있는 임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확인해줬다. (비어드먼이 전한) 빈 라덴의 말로 표현하면 "나와 내 형제들 누구도 미국의 지원을 알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이슬람 전사들은 그들이 미국을 위해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당시에 인식하지 못했으며 정보기관의 고위층에서는 접촉이 있었지만, 현장의 이슬람 반군 지도자들은 워싱턴이나 중앙정보국과 전혀 접촉하지 않은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귀국한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를 위해 복지기구를 건립하고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를 자청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이교도인 미국인들에게 방어를 맡기자 이에 반대하다가 연금되며 반미(反美)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의 관계는 지아 울 하크(Zia Ul Haq) 장군이 부토를 축출하고 파키스탄 군사정권을 세운 이후 더욱 긴밀해졌으며 체첸에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체첸과 관련해서 주요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와 알 카탑(Al Khattab)은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아프간 및 파키스탄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미국 의회의 테러리즘과 비재래식 전쟁에 대한 특별팀 팀장인 요세프 보단스키(Yossef Bodansky)에 따르면 체첸 전쟁은 1996년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열린 히즈브알라(HizbAllah) 국제 비밀 정상회담 중에 계획됐으며 이 회담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이란 및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고위 정보기관 관리들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빈 라덴과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체첸 사태 개입은 무기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급진 이슬람 대리인들은 실제로 전쟁을 지휘한 것을 알 수 있다.

 
빈 라덴은 걸프 전쟁때 이슬람교의 성지 세 곳중 두 곳,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해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여, 미군 주둔을 허락한 왕실을 비판 하여 이 때문에 추방을 당하여 수단으로 향하였다.


걸프 전쟁 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속 주둔을 하자, 이에 빈라덴은 더욱 강하게 반발했으며 미군은 2003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철수했는데 철수결정 계획이 9월 11일 테러 발생 이전에 기정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996년 빈 라덴은 미국과 사우디의 압력에 의해 수단에서 추방당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입국했는데 1998년,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위한 국제 이슬람 전선을 결성하여, "군인, 민간인을 불문하고 미국인과 그 동맹자를 처단하는 것은 무슬림 개인에게 부여된 의무"라는 칙령을 발표하고 결국 반년 후에 대사관이 폭파되고, 하이재킹을 당한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는 전대미문의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빈 라덴을 테러용의자 1순위로 발표하고 결국 세계는 이를 받아들인다.


최근까지 오사마 빈 라덴은 전 세계 10대 지명수배자로 등록되어 있었으며 인터폴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범죄자 7인으로 선발됨은 물론 그중에서 조차 1등을 차지했다.


그는 인식조차 못했지만 미국 중앙정보국이 키운 앞잡이로, 이후에는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이 되기도 했던 희대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에서 결국 그들에게 사살됐다.


빈 라덴의 죽음은 내년에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오바마의 트로피로 불리며 2012년 재선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 줄 것으로 전망돼 죽어서도 미국에게 쓰여진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정창곤 기자 oldpd@paran.com